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 (민용준 인터뷰집)
13인의 감독.
15번의 만남.
34시간 4분 50초간의 대화.
이 숫자는 2021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영화감독들이 허락한 시간과 저자의 언어에 대한 기록이다. 책의 모든 이름 나열 방식으로 적용된 가나다순으로 이어지는 13인의 감독 이름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차례 이상 여성 서사를 다룬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저자가 근 몇 년 사이 인터뷰 기회로 만난 흥미로운 감독들이 대부분이 여성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동시대 영화계에 새로운 화두라 할 수 있는 여성 서사를 다룬 감독으로 채워진 인터뷰집을 기획해 보자는 시작이 되었다. 다만 여성 서사를 다룬 감독을 인터뷰한다고 해서 이 인터뷰집을 여성 감독으로만 채우진 않았다. 일찍이 여성 서사를 다룬 경험이 있는 남성 감독과의 대화도 함께 채우는 방향을 모색했다. 그렇게 어제의 영화를 만든 오늘의 감독을 만나 내일의 대화로 나아가는 여정을 제목에도 담았다.
책 소개
어제의 영화와 오늘의 감독과 내일의 대화로 나아가는 영화로운 언어들
영화의 끝에서 다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된다. 누군가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부터. 13인의 감독과 저자가 전하는 언어들은 우리의 내일을 돌아볼 현재진행형의 여운이 되어 마침내 우리 역시 건너온 세계를 만나 어제를 살피고 오늘을 짚을 수 있도록 이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굉장히 낯설고 납득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심정적인 재난과 뒤섞여 벌어지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하면서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생각해 본 결과가 <벌새>를 만드는 과정이 된 것 같아요’라는 김보라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의 대화들은 우리의 시간에 대해 담고 있다.
그러니 영화에서 희망의 언어를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결국 어제를 돌아봄으로써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와 위안을 품에 안기는 영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만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태도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행복에 다가가는 길을 조금 더 알게 됐으니까 마음먹은 대로 한번 가보자는 단계까진 다다른 거 같아요’라는 감독의 말은 누군가의 조용한 다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김종관 감독의 조제가 건네는 ‘네가 내 옆에 없다고 해도 나는 네가 옆에 있는 걸로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희망의 언어로 기억하고 싶어진다. 완벽하지 않은 채 내일로 나아가는 영화 속 인물들을 만나며 우리 또한 큰 변화 없이 나아지지 않은 채 내일을 맞이해도 괜찮다고.
한국 영화사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 등단한 새로운 역사, 박찬욱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 그리고 <아가씨>까지, 그가 만들어온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올드보이>는 미도(강혜정)만 진실을 모르는 채로 끝나잖아요. 물론 그래야만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모두 다 알게 된 진실을 그녀만 모르는 상태로 끝을 맺어서 왠지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여자만 아무것도 모르게 만든 채 이야기를 끝냈다는 게 찜찜했어요.’ 감독의 말에서는 어쩐지 ‘그’만 모른 채 끝나버린 <헤어질 결심>이 떠오른다. 그의 두 번째 인터뷰는 2020년 6월, <헤어질 결심>이라는 미완의 세계를 갈무리하고 있는 시점에서 진행하여 <리틀 드러머 걸> 이야기까지 세밀히 나눌 수 있었다.
이어서 장르로 규정하기 힘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플란다스의 개>로 시작되어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통해 멀리 나아간 뒤 <설국열차>와 <옥자>라는 전환점이자 반환점을 돌아 <기생충>이라는 새로운 정점까지. 2021년 10월 13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봉준호 감독과 나눈 대화를 담았다. 2020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와 <오징어 게임>의 신드롬과 진범이 밝혀진 <살인의 추억> 그 후 이야기도 직접 들을 수 있다. 결국 최근 진범이 밝혀진 <살인의 추억>은 그런 시대에서 좌절하는 형사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적 기록이고 남자들의 실패를 다루는 영화라고 했다. <기생충>을 떠올리면서는 ’이젠 정말 가족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영화를 찍고 싶어요‘라는 말도 남겼다.
아이다운 시선으로 우리에 대해 우리라는 언어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하는 영화도 있다. ‘우리’라는 다정한 언어의 기질과 달리 때때로 타자화된 이방인에게 ‘우리’란 가혹하고 매몰찬 현실임을 깨닫는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우리집>은 바로 그런 ‘우리’라는 언어를 통해 측정되는 세계에 대해 바라본다. 윤단비 감독의 격랑과 마주한 한 소녀와 한 가족의 이야기, <남매의 여름밤>도 ‘영화가 자기 삶을 잘 살아가는 느낌이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관객 각자의 일상을 만나 그들의 밤으로 기억될 것이다.
겉보기에 비정상의 세계라 여겨지는 희귀한 관점에서도 우리 자신을 명백히 재발견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과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그리고 <보건교사 안은영>의 정유미 모두 한결같이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그려냈다. ‘인물이 성장하기 위해선 그 인물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어야 되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는 방향으로 귀결해야 성장 드라마가 완성될 거라 생각했죠’라는 관점에서 발견된 캐릭터들이다.
이어지는 이옥섭 감독의 <메기> 또한 제목부터 수상한 영화다. 영화의 결말을 닮은 듯한 감독의 말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함이 전해진다. ‘더 이상 ‘나는 어떻게 해요?’가 아니라 ‘마음 단단히 먹어야 돼’로 마음이 정리됐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윤영이가 자신에게 행복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고요. 그리고 관객들도 이런 생각에 공감해주면 좋겠더라고요. 생각할 수 있다면 행동으로 이어질 테니까.’
많은 관객의 기억과 달리 감독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기회는 저자의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과 대화를 나눈 34시간 4분 50초간의 섬세한 순간들 덕분일 테다. <러브레터> 감독으로 기억한 이와이 슌지는 이 책의 대화를 통해 다른 모습으로도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실을 바라보는 이와이 슌지의 언어로부터 단단한 테가 느껴졌다. “사람의 성질이 다양한 만큼 가족의 형태 역시 다양하다고 봐야 마땅한 것이죠”, 그 한마디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시각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되었을 때 만난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과거를 그리지만 결국 미래를 가리키는 영화이며, <정사> <여배우들>로 관객이 기억하는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 관한 대화에서는 사회적 발언에 대한 감독의 담대함을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임선애 감독의 첫 장편 영화 <69세>는 간편한 편견에 갇힌 삶의 가능성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결국 바꾸고 싶은 일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에서는 <69세>를 통해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경험으로도 이해되어 흥미롭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부터 윤단비 이종필 감독까지 13인과의 여행을 마치면 발견의 시간이 다가온다. 어제의 영화와 오늘의 감독과 내일의 대화로 나아가 있음을 발견한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찾는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와 13인의 감독이 그리는 영화로운 언어들과 함께.
저자
민용준 인터뷰하고 쓰다
2006년부터 영화전문웹진 「무비스트」 영화전문기자로 경력을 시작해 매거진 「비욘드」 「엘르」 에디터를 거쳐 「에스콰이어」 피처·디지털 디렉터로서 영화와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칼럼을 썼다.
현재는 프리랜서 영화 저널리스트이자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로서 방송과 강연, GV나 모더레이팅,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단편 예심과 무중력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트레바리 클럽 ‘천일영화’와 키노라이츠 팟캐스트 ‘민용준의 영쾌한담’을 운영 중이다. 그리고 서촌의 집에서 미식전문기자 아내와 동거묘 구니니와 함께 ‘언어와 미각으로 공감하는 영화로운 만남’이라는 슬로건을 담은 ‘시네밋터블(@cinemeetable)’을 운영하며 영화적 취향과 지식을 전하고 있다.
장성용 사진으로 담다
스튜디오 그린비 포토그래퍼 & 디지털 크리에이터
추천사
김이나 작사가
좋은 인터뷰는 알찬 여행과도 같다. 이런 좋은 인터뷰는 그저 그럴듯한 질문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작게는 인터뷰를 나누는 동안의 분위기, 그 안의 아주 미세한 표정과 대화의 템포 그리고 리액션이 있고 크게는 인터뷰이의 철학과 시선, 배경지식 등이 있겠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숙련도로 갖춰지는 게 아닌 전적으로 인터뷰이가 살아온 삶의 디테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민용준 기자가 자신의 시선을 독자들에게 내어주는 것과 같은 이 책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인터뷰어에 대한 신뢰다. 마주 앉아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는, 그러나 한 번쯤 꼭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13인의 감독이 이 책 속에 앉아있다. 독자는 그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어 그들과 1대 1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책을 통한 13번의 여행이 끝나면, 평범했던 일상은 분명 다른 색채를 띨 것이다. 그다음 우리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여행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동진 영화평론가
제대로 묻지 않으면 적절히 답할 수 없다. 진심을 다해 듣지 않으면 열린 마음으로 말할 수 없다. 온전히 공명하는 리액션이 아니라면 명언을 제조하는 구술액션으로도 그저 허사다. 좋은 인터뷰는 회심으로 준비한 질문들이 속속 중앙에 꽂히는 과녁이 아니다. 어디로 방향을 틀어도 어느새 넉넉한 길로 접어들게 되는 정원 같은 것이다. 오랜만에 그런 인터뷰들을 흡족한 마음으로 읽었다. 깊이와 넓이를 함께 갖춰 페이지마다 감독들의 창작 동력과 작업 특성이 또렷하게 담겨 있다. 대화의 흐름과 결 역시 매끄러우면서 생기가 넘쳐, 한 장씩 넘기다 보니 글로 옮겨져 역사가 된 그날 그때의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부터 윤단비, 임선애 감독까지,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곡진한 순간들이 여기 담겼다.
황석희 번역가
종종 인터뷰어가 축구 심판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필드에서 그 누구보다 중립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중립자는 아니며 호각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경기 내용을 흥미롭게, 혹은 따분하게도 만들 수 있는 존재. 민용준 기자의 호각 운용은 언뜻 그의 이미지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과 지식으로 가득하다.
당연하게도 그런 성의는 인터뷰에 온기를 더하고 결과물의 질을 높인다. 필드에 오른 스타 플레이어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할 수 있도록 경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섬세하고 애정어린 호각. 한 권 가득 명경기들을 끌어낸 노련한 호각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차례
● 김보라 어제를 건너온 오늘이라는 세계
● 김종관 여름과 겨울을 지낸 생사와 명암의 사연들
● 김초희 영화의 끝에서 비로소 만난 영화
● 박찬욱 미완의 세계를 파고드는 일관된 시선
● 봉준호 여전히 나아가고 다다를 경지
● 윤가은 어린 눈망울에 비춘 우리라는 세계
● 윤단비 쌓이고 깎여 끝내 드러나는 시간들
● 이경미 정상과 비정상을 아우르는 재발견의 감각
● 이옥섭 엉뚱한 발상과 기발한 착상의 연대
● 이와이 슌지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과 온정 사이
● 이종필 기다리지 않고 짚어오며 만난 시간
● 이재용 경계 너머의 특별함, 선 너머의 담대함
● 임선애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당연함을 향한 질문
이 책의 문장
● 김보라 감독
<어제를 건너온 오늘이라는 세계>
_P.15 떠올릴 수 있다는 건 지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실도, 성장도 오늘로 다다른 자에게만 허락된 세계다. 어떤 시절을 향한 추억도 그 시절을 건너온 자의 몫이다. 만남도, 이별도, 과오도, 성취도, 존경과 사랑도,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자에게 용인된 시간이자 기억이자 역사일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안녕을 고한 어제를 떠올리며 내일을 기약한다. 끊임없이 어제로 떠밀려가는 오늘을 건너 내일로 간다.
_P.34 <벌새>가 1994년을 체험하는 영화라는 걸 새삼 더 명확하게 체감했는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완성한 감독 입장에서도 <벌새>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1994년을 다시 복기하고 체험하듯 다가오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궁금하더군요. (민용준)
그랬던 거 같아요. 저는 <벌새>가 사람들에게 편지처럼 배달되길 바랐던 것 같아요. 실제로 과거에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담긴 편지를 뒤늦게 받은 느낌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 고속 성장하는 시대를 지나온 만큼 배달되지 못한 편지 같은 감정과 기분이 너무 많이 쌓인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전 국민적인 씻김굿 같은 게 필요할 정도로 많은 상처가 남아있다고 느끼는 거죠. 불과 100년 만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0으니까요. 그래서 <벌새>가 1994년을 통과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편지처럼 배달되길 바랐어요. (김보라)
_P.42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굉장히 낯설고 납득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 일상 속에서 찾아오는 심정적인 재난과 뒤섞여 벌어지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야기하면서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생각해 본 결과가 <벌새>를 만드는 과정이 된 것 같아요. (김보라)
● 김종관 감독
<여름과 겨울을 지낸 생사와 명암의 사연들>
_P.59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는 본격적인 첫걸음이라 칭해도 좋을, 은인자중의 세월이 담긴 진정한 첫 장편 영화였다. 평소 걷기를 좋아하고, 차 마시는 걸 좋아하며 대부분 쉽사리 지나쳐 버리는 소소한 풍경의 아름다움 앞에 머무르길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 시선이 <최악의 하루>에 온전히 담겨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영화 속 인물들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오롯이 느껴진다. 어딘가 결여돼 있고 무언가 결핍돼 있지만 그 결여와 결핍을 우스꽝스럽게 비웃거나 하찮게 무시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가 다 완벽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모자람과 어리석음을 웃음으로 내팽개치지 않고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운다. 그렇게 다시 한번 내일로 나아간다.
_P.63 여행자의 시선으로 공간을 본다는 것 자체가 영화에서 공간을 어떤 프레임으로 잡을 것인가,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게 만들 것인가를 대신 설명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김종관)
_P.70 제가 보여주고 싶은 건 자기모순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인데 연애라는 게 그런 감정을 보여주는 도구로 쓰기 좋은 거 같아요.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보이는 이기심과 이타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에서 끌어낼 수 있는 재미가 상당하니까요. (김종관)
_P.136-137 <아무도 없는 곳>과 <조제> <달이 지는 밤>의 <방울소리>까지 계속 겨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최악의 하루>나 <더 테이블> <밤을 걷다>는 여름 영화였죠.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는 흐름이지만 계절이 영화의 미장센 같은 요소가 되는 영화를 거듭 찍어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계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찍어야 하는 계절이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셈이죠. 그런 면에서 계절을 선택할 수 있는 원만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을까 궁금합니다. (민용준)
<조제>는 계절이 정해져 있어서 적절한 때 맞춰 찍은 것이긴 한데 어쨌든 저는 계절적인 문제는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요. 영화에 계절이 반영되는 것 자체를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계절을 포기하거나 그렇지는 않았고요. 다만 옛날부터 길에서 많은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계절이든, 어떤 공간이든, 늘 환경에서 우연과 싸우는 작업을 했죠. 그래서 우연을 제 편으로 만드는 게 늘 중요했어요. 원하는 타이밍을 기다려서 하는 게 아니라 궂은 날은 궂은 날인대로 매력적으로 담아야 되는 거예요. (김종관)
● 김초희 감독
<영화의 끝에서 비로소 만난 영화>
_P.141 영화를 보기 전까진 인생에 관한 지독한 농담처럼 읽히던 제목이 막상 보고 나니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토닥토닥 등을 쓰다듬어주는 따듯한 덕담이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좀처럼 알 길 없이 다가올 시간이 자아낼 떨림으로 나아가길 주저하는 어떤 이들을 위해 내밀고 잡아 천천히 끌어주는 손의 온기 같은 영화다. 인생에 되돌리기 버튼은 없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후회와 아쉬움을 피해 달아나기만 하는 것 같아 대체로 서글프지만 때론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기에 다가오는 매일이란 그만큼 소중하고 절실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어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기억이 된다.
_P.165 방금 말한 것처럼 몇 편의 단편 영화 연출 경험이 있지만 개봉을 목표로 한 장편 영화 연출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미친 바는 없었을까요? (민용준)
(생략) 어떨 때는 스태프 말에 귀 기울여야 되고, 어떨 때는 스태프를 설득해야 하고, 어떨 때는 싸워야 해요. 생각하는 바가 확실하면 흔들리지 않도록 관철시켜야 하고요. 이런 조율 자체가 굉장히 힘들다는 걸 알게 됐고, 감독으로서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가끔씩은 ‘이런 것까지 감독에게 물어보는 거야?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알면서도 환장하겠다 싶을 때가 있는 거죠.
_P.173 살아보니까 마음이 날씨랑 비슷해요.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태풍이 불고, 그렇게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런 걸 느끼며 중심을 잡고 살아보고 싶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인생인 거겠죠. (김초희)
● 박찬욱 감독
<미완의 세계를 파고드는 일관된 시선>
_P.178 박찬욱 감독의 세계가 선사하는 미학적 심미와 철학적 사유는 독단적 고뇌가 아닌 지속적 대화의 산물이었다. 이를 통해 확보한 깊이와 너비를 메우고 채우는 디테일과 스케일의 향연이 작품을 거듭하며 보다 세밀하고 풍요로운 결과로 나아간 건 그런 성취를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재능과 교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재량의 결과였다.
_P.191 정서경 작가님과 공동 각본을 쓰기 시작한 <친절한 금자씨>부터 비중과 역할이 보다 주도적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내면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정서경 작가와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바는
없을까요? (민용준)
그런 면도 분명 있을 거예요. 다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죠. 종종 저를 잘 안다는 이들도 “이 아이디어는 정서경 작가 거고, 이건 감독님 거죠?”라고 물어보는데 틀릴 때가 많아요. 제 관점에서 정서경 작가는 여성적이기보다는 동화적 특성이 있는 이야기를 쓰는 거 같아요. 반대로 폭력과 관련된 부분은 확실히 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박찬욱)
_P.203 상대역을 연기하는 탕웨이 씨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바가 있는데요. 배우의 기존 특성을 비트는 캐릭터 연출에 능하신 감독님께서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배우를 주연으로 섭외했다는 것 자체가 해당 캐릭터를 설명하는 힌트처럼 느껴지니까요. (민용준)
탕웨이 씨는 발음이나 억양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한국인이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인 캐릭터를 연기해요.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보통 선택하지 않을 어휘를 써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인물이죠. 공부해서 배운 단어를 뜻밖의 타이밍에 사용하니까 처음에는 마냥 신선하면서도 웃긴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거 참 절묘한 선택이라고 느껴지는 언어를 구사하거든요. 그만큼 탕웨이 씨가 엄청난 노력을 했고, 사실 지금도 노력 중이에요. (박찬욱)
_P.205 어쨌든 항상 중심에 사랑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스토커>도 그렇고요. 그래서 왜 사랑 얘기를 하느냐고 묻는 건 저에겐 너무 싱거운 질문이 되는 거죠. 제가 새로운 일을 한 게 아니니까요. 이 세상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모든 행복과 고통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박찬욱)
_P.234 <리틀 드러머 걸>의 결말이 보여준 원작과의 차이는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둔 <아가씨>의 결말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습니다. 『핑거스미스』의 결말 역시 두 주인공이 재회하지만 굉장히 불운한 상황에서의 재회이기 때문에 반가움 이면의 후회가 강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가씨>는 그런 결말을 완전히 변주해서 두 여성에게 구원의 쾌감을 안기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면에서 <리틀 드러머 걸> 역시 스스로 죽은 존재라며 한없이 침전하던 원작의 찰리에게 온기를 불어넣고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성장담을 선물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민용준)
그렇죠. 물론 다른 작품에서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두 작품에서는 주인공을 비극적이고 처절한 상태로 내버려 둔 채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그 이후로도 불확실한 상황이 이어지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게 내버려 두는 건 너무 간편한 선택이고, 작가만 고상한 척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거 같더라고요. 우리가 감정을 투자하며 염려해 주던 젊은이들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요. 앞으로 다른 작품에서의 선택은 또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두 작품에서의 저는 그래야 했어요. (박찬욱)
_P.254-255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체성의 혼란과 연기하는 인생에 늘 관심을 갖게 된다고 하셨는데요. 결국 그런 취향과 관점을 통해 이야기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작가 입장에서는 매번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오늘도 ‘나를 위해 쓰인 이야기 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하셨으니까요. (민용준)
<헤어질 결심> 같은 경우도 그런 느낌인데요.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유튜브로 옛날 한국 노래를 찾아 듣다가 정훈희 씨의 ‘안개’를 듣게 됐어요. 그런데 그걸 트윈폴리오가 부른 버전도 있더라고요. 전혀 몰랐는데 유튜브 검색을 통해 알게 됐죠.
그리고 송창식 씨 목소리가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안개가 많은 동네를 배경에 둔 사랑 이야기에서 정훈희 씨 목소리로 한 번, 송창식 씨 목소리로 한 번, 그렇게 두 주인공 입장에서 두 목소리로 부른 ‘안개’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면 멋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정말 이야기가 저에게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죠. (박찬욱)
● 봉준호 감독
<여전히 나아가고 다다를 경지>
_P.265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는 늘 강력한 아이러니와 딜레마가 단단한 반석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로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 별일이란 게 생기지 않을 것 같았던 공간에 대한 인식을 부수는 사건들, 다가갈수록 무력하거나 허망해지는 진실의 실체. 잔혹한 존재의 뒤를 쫓거나 사라진 존재를 찾아 나서는 이들의 간절함과 무력함이 뒤엉키는 아수라장의 희극이면서도 끝내 현실을 환기시키는 생생한 비극으로서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세계.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한 단어의 장르로 규정하기 힘든 세계였다.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다 비집고 들어가는, 어쩌면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장르라 규정해야 할 것만 같은 영화를 연이어 만들어왔다.
_P.276-277 이제 북미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 평론가나 영화업계 사람들의 레이다망에 한국 영화도 확실히 들어선 거 같아요. <오징어 게임>이 지금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봉준호)
_ ‘이렇게 하면 관계자들이 환영하겠지? 투자자는 이런 걸 좋아하겠지? 제작자는 이런 걸 원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휘둘리다가 자신만의 에센스를 잃기 쉽죠. 그래서 오히려 가장 개인적인 관점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특강 같은 걸 하게 되면 이런 얘기를 많이 해왔어요. 그런 생각이 시발점이 된 거 같아요. (봉준호)
_P.291 <살인의 추억>은 화성이라는 소도시에서 특정한 날에 여성을 잡아서 죽이는 범인을 추적하는 남자 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서사와 거리가 있는 영화이지만 여성을 죽이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성 서사가 부재했던 시대성을 다른 의미로 대변하는 영화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 시절의 근원적인 문제를 살피는 영화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민용준)
(생략) 어떻게 보면 그게 씁쓸한 80년대 마초들의 사회상이었던 거 같아요. 심지어 나중에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서로 멱살 붙잡고 싸우고, 그걸 보고 신동철 반장(송재호)이 분노해서 의자를 집어던지며 아수라장이 되는 경찰서 안에서 유일하게 라디오에서 유재하 노래가 나온다는 걸 짚어내는 것도 권기옥 순경이죠. 그게 80년대 여성 캐릭터가 처해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상 그런 남성적인 폭력으로 가득 찬 시대였고, 광주에서부터 그런 폭력을 위시하며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살인의 추억>은 그런 시대에서 좌절하는 형사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적 기록이고 남자들의 실패를 다루는 영화인 거죠. (봉준호)
_ 저는 언제나 장르나 리얼리즘의 경계를 그냥 휘젓고 다니면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장르 영화를 찍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장르의 틀을 부수거나 경계를 흐트러뜨리길 원하거나 끝내 그렇게 해버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작업을 해왔던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봉준호)
_P.303 결과적으로는 <기생충>이 처음으로 4인용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구성원이 꽉 찬 가족이 나오는 영화가 됐죠. 심지어 하나도 아닌 둘 씩이나, 부잣집 4인 가족과 가난한 집 4인 가족이 각각 나오는데 결국 두 가족 모두 파괴돼 버리죠. 더 이상은 이러고 싶지 않아요. (웃음)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고, 이젠 정말 가족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영화를 찍고 싶어요. (봉준호)
_P.312 영화는 그런 걸 다뤄줄 수 있는 매체인 거 같아요. 역사적으로 이뤄져야만 하는 처단이나 응징은 법률과 정치와 사회과학의 세계에서 준엄하게 해줘야 하는 몫이고요. 영화나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그 조그만 틈새를, 단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틈새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 아닐까 싶어요. (봉준호)
● 윤가은 감독
<어린 눈망울에 비춘 우리라는 세계>
_P.353 친근하고 살갑고 정겹다. ‘우리’리는 언어의 첫인상이란. 하나 막상 그 언어의 울타리 안에 안착하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란 어쩌면 다정하게 손을 내미는 세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될 수 없는 타인이 된 나는 외롭고, 쓸쓸하다. 그렇게 ‘우리’는 순둥순둥하게 발음되는 언어의 기질과 달리 때때로 야박하게 밀어내는 척력의 주문이 된다. 타자화된 이방인에게 ‘우리’란 가혹하고 매몰찬 현실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우리집>은 바로 그런 ‘우리’라는 언어를 통해 측정되는 관계의 거리감을 총총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망망한 마음으로 품는다.
_P.362-363 <우리들>과 <우리집>은 ‘우리’라는 단어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살갑고 정답게 들리는 단어지만 두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우리라고 구획된 집단이나 무리에 소속되지 못한 이에게 우리란 정말 가혹하게 타자화된 세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와 가족이라는, 우리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박탈감과 고독함을 실감했다고 할까요? 그만큼 감독님 스스로가 그런 외로움과 소외감에 민감해진 경험이 있었던 건 아닌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민용준)
‘우리’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는 거 같아요. 우리 집이라고 하면 흔히 화목
하고 행복한 가정을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기억하는 우리 집은 저마다 다르고 복잡할 거예요. 겉으로 연상하는 이미지와 달리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죠. (윤가은)
_P.374 어른의 입장에서 원하는 그림을 구현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속도에 천천히 맞춰가면서 이런 걸 하고 싶은데 같이 만들어 달라고, 나도 너에게 의지하겠다고 마음을 열면 생각보다 쉬워지는 일이었어요. 다만 윤리적으로 계속 고민되는 지점은 있죠. (윤가은)
● 윤단비 감독
<쌓이고 깎여 끝내 드러나는 시간들>
_P.383 시간은 관계를 허문다. 존재하는 것들의 형체를 지운다. 그렇게 풍화하는 시간 속에서 상실의 시계가 돌아간다. 필연적으로 모든 관계는 끝내 헤어질 운명이 되고 말 것이다. 곁에 있어서 사소하게 방치되던 것들은 언젠가 곁에서 사라짐으로써 마음으로 들이친다. 꼬박꼬박 제 자리로 돌아오는 바늘이 밀어낸 시간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밀려간 시간과 함께 떠밀려간 인연은 어느 날 파도처럼 밀려온다. 마음을 때린다. 눈이 아니라 마음에 닿는 추억이 되고 나서야 그 격랑이 뒤늦게 실감난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 격랑과 마주한 한 소녀와 한 가족의 이야기다. 그리고 끝내 모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_P.401 결국 <남매의 여름밤>을 만든 건 지금까지 제가 영화를 너무 낭만적으로만 만들었다는, 진짜 하고 싶은 본질적인 이야기를 외면했다는 자기반성이 있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윤단비)
_P.426 그런데 아녜스 바르다처럼 본인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작가주의 여성 감독이 나타나면서 지속적으로 여성 영화인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서로 응원하고 연대한다는 걸 느끼면서 이런 이야기를 봐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윤단비)
● 이경미 감독
<정상과 비정상을 아우르는 재발견의 감각>
_P.433 <미쓰 홍당무>를 보고 ‘와, 이런 한국 영화가?’라고 생각했다. <비밀은 없다>를 보고 ‘와, 이런 한국 영화가?’라고 생각했다. 그간의 한국 영화에 없던 시선과 발상이 불꽃놀이처럼 거듭 폭발하고 확장하는 느낌이자 인상이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렇게 두 차례에 걸쳐 증명한 이경미 감독의 독자적인 시선과 독보적인 발상을 밑천 삼아 원작의 활기를 극대화한 작품이다. 이경미 감독 스스로 ‘명랑 판타지 오컬트 성장드라마’라고 규정한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복잡다단하게 뒤엉킨 장르적 특질을 광기에 가까운 쾌활한 박력으로 돌파해나간다. 능력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운 팔자를 타고난 안은영의 삶처럼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없는 어떤 현실과 특유의 재주로 충돌한다. 그렇게 본 적 없는 감각이 빵 터져 나온다. 이경미 감독 특유의 괴상한 활기가 곳곳에 넘치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작품이다. 이경미 감독의 작품에선 늘 재발견이라는 수사가 무색하지 않게 딱 떨어지는 캐릭터가 등장해왔다.
_P.448 김강선의 죽음과 관련한 5화의 에피소드는 <보건교사 안은영>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도드라지는 면이 있습니다. 대체로 작품 특유의 세계관 안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적당히 거리를 벌린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강선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특이한 그 학교에서 벗어나 청년 문제나 노동자 문제 같은 동시대 사회문제와 밀착한 사연이니까요. 그럼으로써 이 작품이 보다 거시적인 맥락까지 다다르는 이야기라는 인상을 부여하는 면도 있고요. (민용준)
결국 은영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사회적 문제와 결합한 에피소드였다고 생각해요. 정세랑 작가님도, 저도 그런 사안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더 강조하게 된 것 같기도 한데 기능적으로 보자면 강선이 얘기를 부각하면서 숨어있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은영이가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에피소드였던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그 에피소드를 만든 뒤 뉴스 기사로 비슷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강선이가 떠올라서 슬펐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던 것처럼 <보건교사 안은영>을 본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던 누군가의 비극을 내 이야기처럼 느낄 수 있을 거라 희망하게 됐죠. (이경미)
_P.472 엄마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뭔가를 찾아가는 엄마를 더 강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웃지 않는 여자를 보여주고 싶었고요. 주변에서 그런 걸 비호감이라고 할 때마다 자기 검열을 하면서도 끝내 이런 걸 다 가져가려 했던 건 결국 그런 걸 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인 거죠. 그 과정에서 저 역시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자고 제 자신을 다독일 수 있었고요. (이경미)
● 이옥섭 감독
<엉뚱한 발상과 기발한 착상의 연대>
_P.497 엉뚱하고 희한한 감각의 나열 끝에서 예민하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여운. <메기>는 지금껏 등장한 수많은 한국 영화 속에서 보지 못했던 감각의 인력을 형성하고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인 동시에 예민하게 현실을 환기시키는,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절묘한 콜라주 같은 영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다소 생소한 광경으로 뇌리에 박힐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마냥 익숙한 풍경으로 손쉽게 소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영화라서 지극히 낯설고, 낯익다.
_ 다들 조금씩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서 막상 타인에게는 일말의 흠도 없는 사람처럼 구는 집단의 모순된 심리를 공간에 비춰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옥섭)
_P.521 극 초반부에서 세탁소 아저씨가 윤영에게 줄 음료를 고르던 중 요구르트와 좀 더 비싼 요구르트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크고 작은 고민을 이어 나가는 인물들의 심리가 느껴지죠. 결국 고민과 선택, 의심과 확인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사소하더라도 최선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민용준)
우리에게 진실이라고 툭 던져진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다 당연하다고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상처가 내게 올 수도 있는 거니까 좀 더 지켜보면서 그게 믿을 수 있는 진실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관객 역시 함께 진실을 알게 되는 셈이니 그게 용기를 주는 진실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이옥섭)
● 이와이 슌지 감독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과 온정 사이>
_P.530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가 <뱀파이어> 이후로 5년 만에 발표한 신작이자, 2004년에 개봉한 <하나와 앨리스> 이후로 12년 만에 일본에서 촬영한 극영화다. 국내에서는 <뱀파이어>가 정식으로 개봉하지 못했던 터라 실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이기도 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진실을 은폐하는 정부를 향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던져온 이와이 슌지가 불행한 현실을 전전하는 어느 개인의 이야기를 만든 건 우연 같지 않다.
_P.533 사람의 성질이 다양한 만큼 가족의 형태 역시 다양하다고 봐야 마땅한 것이죠. 심지어 가족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남들이 봤을 때 독특하다고 느끼는 가족도 존재하는 법이고요. 영화를 만들 때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그런 다양한 관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와이 슌지)
_P.542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다는 것일까요? (민용준)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이 누구에게나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특별한 생사관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제 영화에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투영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의미죠. 제가 만든 모든 작품에서는 크건 작건, 삶과 죽음에 대한 표현은 꼭 드러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삶과 죽음은 제 영화가 항상 품고 있는 주제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죠. (이와이 슌지)
● 이종필 감독
<기다리지 않고 짚어오며 만난 시간>
_P.547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심각한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굳이 인상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는 또 하나의 성취다. 내부 고발자가 지워지는 현실을 반영하기보단 승리의 서사를 쟁취하겠다는 영화적 선언에 가깝다. 콜라주하듯 재현된 90년대의 갖은 풍경을 병풍 삼아 평범한 세 여성이 대기업에서 은폐하려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내 해결하기까지의 과정은 통쾌하고 맹렬한 카타르시스의 통로가 된다. 지난 한 시대가 주인공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끝내 그 시대에 가려져 잊힌 누군가를 조명하고 주목하게 만든다.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는 비정규직 여성들의 명랑한 웃음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실제적인 표정을 환기시키는 호흡이나 다름없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거둔 흥행 성과만큼 주목해야 하는 영화적 성취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_P.560 말씀하신 것처럼 <삼토반>은 포스터만 봐도 정말 많은 여성 캐릭터가 최전선에 배치된 영화입니다. 벡델 테스트 정도는 초반부 몇 신만에 통과해 버리죠. 그래서 사실 감독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전에는 당연히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기도 했습니다. (민용준)
개인적으로 제가 여자였다면 훨씬 완벽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제 역량이 부족해서 오점이 많은 영화이지만 가장 큰 오점은 제가 남자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처음 연출 제안을 하신 제작사 ‘더 램프’ 박은경 대표님께도 ‘이건 여성 감독이 연출해야 하는 영화 아닐까요?’라는 질문을 드리긴 했어요. 심지어 대표님도 여자이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하기로 했죠.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남성 감독이라는 의식을 최대한 철저하게 배제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에는 감독이 있는 거야?’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독으로서 그림자 노동을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죠. 애초에 그림자 노동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페미니즘에 관한 책도 정말 많이 봤고,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인지 고민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걸 의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가 하는 이야기에만 집중하고자 했어요. 어차피 그 부분은 감상하는 관객들이 보고 판단하는 거니까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여성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한 명 한 명으로서 바라보려 노력했고요. (이종필)
_P.596 <삼토반>은 특정한 사건을 외피에 두르고 이런저런 드라마를 그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은 왜 일을 하는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들이 기억을 하건 말건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다고 말해주는 영화고요. 기록을 통해서 그걸 기억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실화를 그린다는데 집중했던 영화는 아닌 거 같아요. (이종필)
● 이재용 감독
<경계 너머의 특별함, 선 너머의 담대함>
_P.606 <정사>부터 <죽여주는 여자>까지, 이재용 감독은 저색의 금기를 건드리거나 이색의 형식을 넘어섰다. 꾸준히 선을 넘고, 그 너머의 세계를 탐미하고 탐닉했다. 각기 다른 파격과 파열의 정사와 정서를 그린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헛헛하게 저물지언정 홍안처럼 물든 당장의 욕망을 끌어안고 낙조처럼 저무는 관계를 관조한다. 카메라 전후의 경계와 존재를 지우듯 목도하고 연출한 <여배우들>과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는 실재와 허구의 영역을 과감하게 무너뜨리면서도 아리송하게 보존하는 실험적 유희를 제공한다. 대체로 범상하지도, 무난하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우리에게는 이런 특별하고 담대한 영화가 더 필요하다.
_P.614 사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잖아요. 그럼 사는 게 진짜 지옥이 되는 거니까.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도 필요한 거죠. (이재용)
_P.616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코피노 문제를 비롯해 몰염치하거나 무책임한 한국 남자들의 군상을 인지하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민용준)
영화에서 코피노 소년 만호(최현준)의 아빠로 추정되는 의사 주환(서현우)도 결국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친 셈인데 그걸 보고 간호사(한겸)가 한마디 하잖아요. “한국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지, 뭐”라고. 현실 속에서 여성을 다루다 보면 결국 여성성이라는 게 사회적 약자라는 정체성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현실이 이 모양이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재용)
● 임선애 감독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당연함을 향한 질문>
_P.631 도전적인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도전하려 들어서 도전적인 영화인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대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다. 영화가 애초에 의도했건, 의
도하지 않았건 그렇다. 이 작품을 본 이후에 쏟아지는 언어가 지금의 시대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건 영화 탓이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이고, 그런 개개인이 모
여 이 사회를 이룬 것이므로, 결국 이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운명이 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자리한 시대가 영화가 제시하는 소재를 도전적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그런 영화가 있다. 임선애 감독의 첫 장편 영화 <69세>가 그렇다.
_P.638 세상에 고발장을 띄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그런 다짐을 부르는 계기가 어떤 것일지, 그런 걸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주변인에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피해자인 효정(예수정) 스스로가 고발장을 보내길 선택하고, 가까운 동거인으로 설정된 동인(기주봉)이 나름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그런 선택을 함께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뤄보자고 마음 먹었죠. (임선애)
글: 민용준
사진: 장성용
분야: 예술 > 영화
출간일: 2022년 8월 01일
면수: 680쪽
판형: 128×188 mm
ISBN 9791197915222 (03680)
출판사: 진풍경
13인의 감독
김보라, 김종관, 김초희, 박찬욱, 봉준호, 윤가은, 윤단비, 이경미, 이옥섭, 이와이 슌지, 이종필, 이재용, 임선애
배송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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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 (민용준 인터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