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비(非)시적인, 건조한, 테크니컬한, 아카데믹한 단어들이 시인의 일상에 기습적으로 끼어들어 ‘가장 문학적인’ 사유의 통로를 여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안희연은 “모든 단어들은 알을 닮아 있고 안쪽에서부터 스스로를 깨뜨리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45편의 글을 통해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발산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운을 목격”한다.
안희연은 평소 자신을 ‘시 쓰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단어 생활자’라 일컫는다. 그는 TV를 켜놓고 요리하다가, 길을 걸으며 간판을 보다가, 세탁물을 수거하러 온 기사님을 마주하다가, 갑자기 끼어들어 주변을 채색하는 단어들로 인해 멈칫한다. 그리고 단어들을 모든다. 안희연은 ‘단어’를 통해 ‘삶’을 본다. 단어에서 단어로 미끄러지는 도미노 놀이는 평범한 일상에 다채로운 무늬를 그리며 계속된다.
목차
프롤로그: 촛불을 들고 다가서면
1.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길항
규모
적산온도
주악
삽수
라페
몰드
버저 비터
휘도
잔나비걸상
버력
피막
블라이기센
2. 홀로 짓는 표정 같은 말
모루
유루
내력벽
루어
흑건
오고오고
가시손
빈야드
구득
홈질
선망선
출몰성
플뢰레
덧장
탕종
꼭두
3. 나의 작은 말들의 놀이터
안료
탁성
벼락닫이
적화
밀코메다
묘실
파밍
기저선
네온
불리언
덖음
시드볼트
모탕
페어리 서클
도량형
끗
책 속에서
P. 18
나의 책 읽기는 매번 이런 식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들을 붙들고 살다 보니 책이든 삶이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갈 리 없다. 소설을 읽을 땐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머무느라 방금 전까지 읽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소망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길항이라는 단어에까지 다다른 하루였으니 이를 생산적 난독이라 말해도 될까.
P. 32
그런 의미에서 시는 내가 아는 가장 간결한 형태의 다반이다. 말과 침묵이 비등한 무게를 지닐 때가 많고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질 때도 있다. 글을 퇴고할 때도 무언가를 자꾸 덧붙이려는 나를 가장 경계하곤 한다. 그건 불안이니까. 사족이니까.
P. 83
독일에는 ‘블라이기센(Bleigießen)’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12월 31일 밤이 되면, 납을 녹여 그림자의 형태나 굳은 모양을 보고 한 해의 운을 점치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블라이기센 키트(kit)를 팔기도 하는데 1~2유로면 구입이 가능하단다. 내가 녹인 납이 권총, 칼, 토끼, 그 밖에 어떤 모양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해석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만 그 작은 의식을 통해 각자가 살아낼 일 년의 모양을 예감해보는 것이겠다.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P. 121
내게 가시손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존재론적 슬픔을 함의한 광막한 단어다. 문득 가시손의 반대말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들의 총합이듯이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들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P. 147
그래서 꽃이 왔을 것이다. 꽃은 말이 아닌 것으로 출몰하는 존재다. 너는 나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적이 있어. 그리고 그것을 버렸지. 그것도 쓰레기봉투에. 별 뜻 없이.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것이 꽃이기만 할까. 중요한 건 버림의 촉감을 네 손이 기억한다는 사실이야. 세상의 비극은 너무 멀리에 있어서 대신 꽃을 보냈단다.
P. 177~178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선생님, 전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요. 저도 밝고 명랑하고 귀여운 거 하고 싶어요. 어리광을 빙자해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을 불쑥 내비친 것이다. 그땐 정말이지 시가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 K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P. 196
오늘의 나는 오늘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 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P. 228
매일매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세상에 들볶이는 기분과 찻잎의 덖음 사이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어쩌면 세상도 우리를 들들 볶는, 아니 덖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보다 향기롭고 귀한 찻잎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물의 세계에 기필코 담겨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물에게서 공포만 볼 것이 아니라 물이 가진 다정함, 안락함, 온화함, 고요함도 한번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P. 249~250
“넌 문학해서 손해 본 점이 뭔 것 같아?” 하루는 시인 친구와 밥을 먹다 대뜸 물었다. 친구는 어디 밥상머리에서 일 얘기냐며 핀잔을 놓았지만 이내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손해의 의미가 정확히 뭐야. 귀찮음이야 싫음이야 난처함이야. 문학하는 사람은 역시 이래서 안 되나 보다. 단어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매 순간이 허들이다.
P. 260
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 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붙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추천인의 글
안희연은 누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그는 잘 듣는 사람, 열린 사람, 그리하여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그게 시에 관한 거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린다면, 산뜻한 대답이 필요하다면, 나는 항상 안희연을 찾는다(그도 잘 알 것이다). 그의 눈과 귀, 입과 ‘쓰는 손’을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일상과 걸음, 시선과 사유, 다정한 태도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어에서 시작해 생활의 복판에서 끝난다. 문장은 쉽고 따뜻하며 빛난다. 언어를 오래 살피는 사람이 종국에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난다. 읽는 내내 귀가 활짝 펼쳐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내는 소리라면 허밍이라도, 단 한 박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
- 박연준 (시인)
저자 소개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출판사 서평
지은이: 안희연
출판사: 한겨레출판
출간일: 2021-11-24
쪽수: 264쪽
판형: 120*200mm
ISBN : 979116040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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