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힌 돌
책소개
미술가 김영글이 돌 이미지에 관해 쓴 일종의 이미지비평서로, 예술 작품과 삶의 공간 여기저기서 발견한 돌을 한곳에 불러 모아, 돌이라는 사물에 사람이 부여해 온 다양한 의미를 채집하고 해석한 책이다.
목차
0. 뼈
1. 수집가의 말
2. 바위가 있는 곳
3. 전쟁바위
4. 말하는 돌
5. 그냥 돌멩이
6. 표면여행
7. 돌이 떠 있는 동안
8. 꿈 꾸는 돌
9. 주먹도끼
10. 닮은 돌
11. 얼굴 I
12. 얼굴 II
13. 얼굴 III
14. 얼굴 Ⅳ
15. 자라는 돌
16. 틈
17. 기억하는 돌
18. 자국
19. 바위섬
20. 받아쓰기
21. 둥근 것들
2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책속에서
p8. 여자가 눈을 감고 걸으며 등 뒤로 돌 하나를 던졌다. 돌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람이 되었다. 또 다른 여자의 형상이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눈을 감고 걸으며 등 뒤로 돌 하나를 던졌다. 돌은 또 하나의 남자가 되었다. 돌을 던질 때마다 세상을 이루는 크고 작은 사물의 형상이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여자와 남자는 갖게 되었다. 이웃을, 친구를, 자식을, 사랑을, 꿈을, 예술을, 문명을, 적을, 죄악을, 전쟁을, 끝없이 되풀이되는 전설들을.
p11. 사람으로 태어나서 좋은 점을 말하라면, 몇 개 안 되기는 하지만 그나마 꼽아보자면, 그중 최고는 역시 예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신을 놓고도 비슷한 말을 한다. 결국은 삶이 유한한 일회적 사건이라는 보편적 믿음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큼 인간의 흥미를 끄는 일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세계의 무의식 안에서, 역사와 예술이라는 공동의 기억 수장고 안에서 삶은 계속된다.
p12. 요컨대, 수집의 기쁨은 돌의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함에서 온다. 내가 모을 수 있는 돌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만약 세상에 돌이 단 한 개밖에 없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값어치가 나가겠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물일 것이 틀림없다.
p31. 야바위꾼은 기분이 좋으면 노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로 묘기를 보여줄 때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분명히 컵 아래 있던 돌이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다. 돌은 미스터리였고 수수께끼였다. 그러다 야바위꾼이 담배를 피우려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쉴 때, 수레 위 베니어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돌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런 특색도 없는, 그냥 아주 작은 돌멩이에 불과했다.
p40. 우리의 시선은 김경태가 촬영한 돌의 표면을 통해서 돌을 처음 보듯이 본다. 그 안에는 어떤 사실들이 숨어 있다. 각각의 돌이 경험한 세월은 켜켜이 축적되어 빽빽한 시간의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뚜렷한 목적 없이 돌의 입자 위를 걷는 탐험가가 된다. 마치 가택연금 동안 자신의 익숙한 방 한 칸을 구석구석 묘사하는 책을 써 보았던 묘사하는 책을 써 보았던 어느 18세기 작가처럼, 우리는 이 또렷한 이미지의 프레임에 감금된 채 그동안 흔하게 보아 온 돌의 얼굴 구석구석에 다시 시선을 던질 것을 요청받는다.
p84. 누가 어떤 연유에서 이 인어 석상을 만들었으며 왜 바다에 등을 돌린 채로 앉혀 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이 석상을 진정한 인어의 이미지에 조금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같다. 어떤 얼굴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p150. 차학경은 유관순, 잔다르크, 바리데기, 성 테레사, 그리고 만주에서 태어나 이주와 실향으로 점철된 수난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 등 여러 여성의 삶을 차례로 호출한다. 폭력적인 역사 속에 사라져간 익명의 음성들은 미지의 영토에서 몸을 갖고 되살아난다. 차학경이 출처 없는 인용과 계속해서 탈주하는 서사를 통해 시도하는 글쓰기는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를 정체화하려는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글쓰기이자, 잊힌 이름들을 호명함으로써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p156. 우리는 화석에 남은 희미한 흔적이나 바위의 단면만 보고도,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어떤 나라가 한때는 육지였다고, 또는 섬이었다고, 어떤 숲에는 호랑이와 곰이 분명 살았었다고, 이 화산이 백년 뒤에는 다시 폭발할 거라고, 고양이가 집짐승으로 사육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만 년 전의 일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지구 안에서의 시선과 판단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안다.
p162. 나는 유럽에서 만난 노인들의 울퉁불퉁한 발목도 떠올렸다. 작은 동굴의 천정에서 지하수 방울들이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다 굳어 종유석이 되듯이, 오랜 세월 석회질이 축적된 노인의 두 길쭉한 터널 내부에서는 침식과 중력의 작용이 숨죽여 진행 중이었다. 자신이 온 곳으로 기어코 돌아가려는 그 느리고 고집스러운 석회질 덩어리의 움직임이 나를 슬프게 했다. 병이 들고, 낫고, 늙고, 죽어가는 그 모든 과정에 최상위 포식자로 침투해 육체를 잠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시간이었다.
저자 소개
김영글
쓰고 만드는 사람. 글쓰기, 영상, 출판,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엮으며 활동해 왔다. 이 책과 같은 제목의 개인전 《사로잡힌 돌》을 세마창고에서 열었고,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 『모나미153 연대기』 등의 책을 지었다.
출판사 소개
최근작 : 『깊은 밤의 파수꾼』(15년차 콜센터 야간 상담사의 에세이집), 『제로의 책』(‘제로’라는 키워드로 엮은 공공예술의 현재), 『호수 일지』(어느 미술가의 무용하고도 아름다운 삽질의 기록), 『노아와 슈바르츠 와 쿠로와 현』(검정색에 대한 탐구), 『고양이 행성의 기록』(1930년대 중국 디스토피아 SF 소설), 『나는 있어 고양이』(현대미술가 8인이 쓴 고양이 에세이집), 『모나미 153 연대기』(국민볼펜 모나미로 다시 쓴 한국 현대사)
출판사 서평
눈앞에 돌이 있다. 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생물 가운데서도 인간과 가장 거리가 먼 사물. 돌과 인간의 공통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돌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과 축적된 세월이 돌 안에서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은 침묵이 장기인 자연물이지만, 돌에 덧씌워진 이미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 속으로 돌 앞에 선 이를 데려간다.
사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집중해온 미술작가 김영글은 2018년부터 돌 이미지를 수집해 왔다. 2019년 세마창고에서 연 개인전 《사로잡힌 돌》은 수집한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아카이브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애초의 목적은 돌을 탐구하는 것이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돌이 아니라 돌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과 욕망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돌이라는 사물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실용적 도구가 되기도 하고, 미적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과 사회 현실을 투영하는 이야기가 아로새겨진다는 점에서 예술과도 닮아 있다.
리서치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관심은 특정 사물과 이미지의 구체적 형상을 향하는 동시에 인류의 습속과 문화에 깃든 인간 심리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목표를 향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수집이라는 행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물을 늘 횡적인 배열로 바라보게 하고, 이미지 안에서 느끼는 서사에 대한 갈증은 사물을 늘 종적인 역사로 읽게 만든다. 이 전시는 사물을 대하는 그 두 가지 방식을 서로 교차시켜보는 실험이기도 했다.” 『사로잡힌 돌』 은 그 실험의 과정에서 특별한 애정으로 건져올린 돌 이미지들에 관해 썼던 글을 다듬고 고쳐 2024년 새로이 엮은 것이다.
다시, 눈앞에 돌이 있다. 돌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치 돌멩이 수프 속의 돌멩이가 원래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 돌을 집어들더라도 그 무심한 물체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 : 김영글
디자인 : 최진규
펴낸곳 : 돛과닻
판형 : 136×X156mm
면수 : 168 쪽
발행 : 2024 년 1 월 31 일
ISBN : 9791198650214 (02600)
분류 : 현대미술, 에세이, 예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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